'꽃거지룩'의 완성, 이 중고 카디건이 33만弗 넘게 팔렸다고?

입력 2024-03-07 17:43   수정 2024-03-14 16:58


“내가 누군가의 침대 밑에 처박힌 낡은 카디건처럼 느껴졌을 때, 넌 나를 입고 가장 좋아하던 옷이라고 말해줬지.”

현존하는 가장 성공한 싱어송라이터, 실력과 미모 그리고 부와 젊음까지 다 갖춘 테일러 스위프트는 자신의 뮤직비디오 ‘카디건’에서 헐렁하고 넉넉한 단추 달린 스웨터를 주섬주섬 주워 입으며 이렇게 읊조린다. 세상을 다 가진 이에게도 포근하게 안아주는 누군가가 필요하고, 늘 유행을 선도하며 잘 차려입는 이들도 할아버지의 푸근한 미소, 할머니의 다정한 살 내음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옷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카디건 얘기도 들어 봤는지. 펑크록, 얼터너티브록의 지존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1993년 MTV 언플러그드에서 심드렁하게 입고 나온 후 ‘꽃거지룩’(그런지룩)의 전설로 박제된 중고 카디건은 미국 시애틀의 어느 헌옷가게에서 주워 입다시피 한 그의 일상복이었다. 충격적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그의 아이 돌보미는 이 옷을 빨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가 2015년 경매에 내놨다. 당시 13만7500달러(약 1억8000만원)에 팔린 뒤 2019년엔 33만4000달러(약 4억4400만원)에 재낙찰됐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카디건으로 두 번이나 이름을 날린 셈이다.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성공에까지 반기를 든 코베인도 그의 짧은 음악 생애에서 가장 상업적인 방송에 출연할 땐 자신을 보듬고 용기를 주는 옷으로 카디건을 선택한 것 같다.


그나저나, 혹 이 글을 읽으면서 눈치를 챈 이들도 있으리라. 우리가 흔히 ‘가디건’이라고 발음하는 그 옷을 계속 카디건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부턴가 한국에선 가디건으로 불리고 있지만 영문 표기도, 발음도 카디건이 옳으니 이제부터라도 함께 카디건이라고 부르기로 제안한다. 단추가 달린 스웨터를 왜 카디건이라고 부르게 됐는지 카디건의 역사를 알아보자.
19세기 최고 인플루언서가 만든 옷
카디건이란 이름은 처음 이런 형태의 옷을 생각해낸 사람의 칭호였다. 19세기 영국 귀족인 제7대 카디건 백작, 제임스 브루데넬이다. 관종적 기질을 타고났는지 일찌감치 장군이 되고 싶던 그는 군에 입대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장교로 자원했다. 정식으로 백작 지위에 오르자 자신이 이끄는 부대 사병들이 다른 부대보다 더 멋있어 보이게 하려고 초호화 장비를 지급한다. 곧이어 발발한 크림전쟁에서 그의 부대는 바라클라바 계곡에 투입된다. 전술상 자살 돌격이나 다름없는 그 전투에서 부대는 큰 피해를 보지만 우수한 장비 탓이었을까?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목표지점에 도달한다. 상처뿐인 영광이었지만 무책임한 장군 때문에 아깝게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죽음은 정치적인 이유로 그냥 잊혀졌다.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러시아를 상대로 용맹을 떨친 귀족 출신 장군’으로 과대 포장됐다. 영국군의 위세를 전 유럽에 자랑하는 최적의 홍보 소재로 선택된 것이다.

영문도 모르는 대중으로부터 그는 ‘전쟁 신화’이자 유능한 전략가라는 찬사를 얻게 됐다. 이제 남은 일은 거짓 무용담을 쏟아내는 일이었다. 전쟁 영웅으로 돌아온 그의 초상화, 그의 영웅담을 담은 책이 불티나게 팔렸다. 사교계를 누비는 그의 패션과 귀족 취미는 모두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그야말로 19세기 최고 인플루언서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종종 보온을 목적으로 코트 안에 니트로 짠 단추 달린 조끼를 입고 다녔는데, 후에 코트 뒷자락이 불에 타는 일이 발생한 뒤 조끼에 소매를 붙이고 뒷자락을 짧게 만든 오늘날의 카디건과 비슷한 형태의 옷을 고안했다. 이 옷은 카디건 백작이 즐기던 많은 스포츠에 적절하게 어울렸다. 전장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만들어 입었다는 거짓 무용담에 힘입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카디건 백작의 보온 스웨터’라는 이름이 축약되면서 카디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상남자’ 스티브 매퀸 통해 카디건 매력 뽐내

이렇게 멋진 영웅의 옷은 꾸준히 다양한 계층에 사랑받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푸근하고 나이 든 이미지를 갖게 된다. 남성복으로서의 근사하고 힙한 이미지는 ‘남자 중에 상남자’ 스티브 매퀸을 통해 완성된다.

‘황야의 7인’에서 시작된 필모그래피는 ‘대탈주’ ‘르망’ 같은 마초적 영화로 점철돼 있는데 ‘신시내티 도박사’(1965) ‘불리트’(1968) 같은 영화에서 그가 입고 등장한 숄칼라 카디건(칼라가 둥근 숄 모양 카디건)이 남성복 역사에 길이 남는 최고 아이템으로 등극한다. 한때 한 럭셔리 브랜드가 비슷한 디자인의 카디건에 그의 이름을 붙여 판매를 시작하자 그의 아들은 “아버지 이미지를 도용했으니 최소 200만달러를 배상하라”는 고액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카디건의 여성성은 창의력 넘치는 여성복의 해방자, 디자이너 코코 샤넬 덕분이다. 남성복 입기를 즐긴 샤넬은 목이 좁은 남성용 스웨터를 입다가 공들인 헤어스타일이 망가지는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당시까진 남성복이던 카디건에 단추를 달아 헤어스타일을 지키며 입고 벗을 수 있게 했다. 오늘날 여성에게 널리 사랑받는 카디건을 탄생시킨 것이다.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해줄 뿐 아니라 마음까지 안아주는 옷 카디건은 누군가에게 견뎌내는 힘과 용기를 북돋는 옷이다.

한 시대의 걸출한 인물을 정의했고, 여성들에겐 자존감과 해방감을 선물한 카/디/건! 이제 그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줄 때가 된 것 같다. 가디건이 아니라 ‘카r디건’이라고 한번 불러 보시기를.

한국신사 이헌 패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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